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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김문홍의 연극 이야기> 심연을 보는 순간 괴물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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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연을 보는 순간 괴물이 된다

                                 더블 스테이지의달빛 소나타

     

     

     

                                                              연극평론가 김 문 홍

     

     

     

    욕망과 본능의 심연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싸움 속에서 스스로도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우리가 괴물의 심연을 오래 동안 들여다본다면, 그 심연 또한 우리를 들여다보게 될 것이다라고 선악의 저편이라는 그의 저서에서 인간의 욕망과 본능에 대해 섬뜩하게 지적한 프리드리히 니체의 섬뜩한 경고는 두고두고 곱씹어 볼 만하다.

    현대심리학의 아버지라 일컫는 프로이트는 인간의 무의식을 주의 깊게 들여다보았다. 그는 이드라고 불리는 이 무의식은 평소에는 에고의 통제 속에 있는데, 그 통제를 벗어나 자유롭게 활동할 때가 있는데 그것의 대표적인 것이 이라고 했다. , 꿈은 에고의 통제 속에 억눌려 있던 본능과 욕구의 또 다른 얼굴이라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무의식을 이끄는 추동적 힘을 리비도라고 불리는 성적 에너지로 불렀다. 니체가 말한 심연은 어쩌면 리비도의 음습한 공간을 말하는 것으로, 괴물과 싸우는 배경적 공간인지도 모르는 일이다.

    34회 부산연극제 경연참가작인 극단 더블 스테이지의 달빛 소나타(김지숙 작, 김동민 연출, 2016.4.15.4.16, 시민회관 소극장)는 인간의 본능과 욕구에 대한 서늘하고 끔찍한 심리보고서에 가깝다. 가장 친화적인 존재인 아버지에게 성폭행당한 딸이 그녀의 무의식 속에서 괴물과 사투를 벌이는 과정을 무채색의 심리적 풍경으로 보여주고 있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순수를 짓밟은 아버지를 참혹하게 징벌하는 투쟁에서 결국 그녀 자신 역시 괴물이 되어 가는 과정을 섬뜩하게 그리고 있다.

    이 작품으로 희곡상을 수상한 희곡작가 김지숙은 공간소극장의 김문홍 희곡 창작교실출신의 신예작가로, 정통 사실주의 극작술보다는 부조리극의 궤를 따르고 있으며, 인물의 대사 역시 냉소적이고 지적인 함축성이 번뜩이고, 작품 세계 역시 인간의 무의식 세계에 도사리고 있는 괴물의 존재와 그 심연을 서늘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등 현대인의 그로테스크한 의식의 풍경에 메스를 즐겨 들이대고 있다. 주제의식이 명확하게 그 초점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아쉬움이 하나의 흠이다.

    김지숙의 일련의 작품이 그렇다. 현대인의 부조리한 심리적 공간과 그 속에서 벌어지는 부조리한 관계를 냉소적으로 형상화한 라랄라 흥신소, 그리고 인간 무의식의 심연 속에서 뒤엉킨 본능과 욕망을 냉소적 시각으로 접근한 일련의 단막극 작품들 역시 일관된 주제의식의 맥락을 지켜오고 있다. 각 작품 속 인물들의 대사 역시 지적인 함축성을 지니고 있는데, 그것들은 모두 나름대로 지적인 에스프리를 발산하며 묘한 극적 분위기와 그로테스크한 심리적 뉘앙스를 뿜어내고 있어 작가의 독특한 개성을 상징해 주고 있다.

     

    상상과 환상의 징벌을 통한 순수의 회복   

    달빛 소나타의 배경적 공간은 두 개의 층위로 나뉘어져 있는데, 하나는 딸인 옥선’(이효심 분)이 웅크린 채 우두커니 앉아 있는 2층 그녀의 방이고, 다른 하나는 허위를 아늑한 가족의 공간으로 포장한 1층의 거실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공간은 무대 후면 2층 중앙으로 징벌이 이루어지는 공간이다. 2층 그녀만의 공간은 상상과 환상의 판타지적 세계로 그녀만의 무의식의 심연이다. 이러한 무의식의 심연에서 발아한 징벌에의 욕구는 2층 후면 중앙의 공간에서 그녀의 상상에서 복원된 오빠 광재(김성은 분)에 의해 본능적 욕구의 대상들이 제거된다. 그리고 징벌된 본능의 처참한 흔적들은 1층 우측의 수납공간에 방치된다.

    그녀는 가끔 우측 수납공간에서 휠체어를 탄 아버지를 불러낸다. 아버지(최현호 분)라는 존재는 이 작품 속에서 다중적 의미를 지니는데, 하나는 그녀가 염원하는 안온하고 행복한 가족의 표상적 존재로 등장하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이제는 부자유한 신체 조건으로 옴짝달싹 못하는 초라한 존재로 그녀의 통제 하에서 꼭두각시처럼 움직인다. 그리고 수납공간에 미이라로 방치되어 있는 본능적 욕구의 초라한 흔적으로서의 사체이다. 이미 9살 때 죽은 오빠 광재는 그녀의 상상적 공간에서 복원된 지원군으로 그녀와 함께 가족의 훼손을 막아 끝까지 가족의 진정한 가치를 지키려 하는 그녀의 든든한 지원군이다. 오빠는 그녀의 의식 속에서 서슴없이 살인을 저지른다.

    몇 가지 아쉬움 역시 숨길 수 없다. 그녀가 치는 피아노 소리를 좇아 방문한 이웃집 여자(김지은 분)는 이미 자살한 어머니의 대역을 위해 살해되어 수납공간에 방치된다. 그러다가 그녀는 안온한 가족의 풍경에 대한 그녀의 갈증을 채워주기 위해 아버지의 휠체어를 뒤에서 밀어주는 어머니 역을 대신한다. 이웃집 여자가 살해된 원인은 징벌된 본능의 흔적들을 방치한 수납공간을 훔쳐보았다는 점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단순하게 죽은 어머니의 대역을 위한 무모한 희생타였는지, 그것도 아니면 보지 말아야 할 심연을 보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녀가 가족의 안온한 풍경을 구성하는데 동원되어 희생되었다는 것은 뭔가 석연치 않다.

    택배기사(손정훈 분)의 어이없는 죽음도 그 모티프가 명확하지 않다. 그녀에게 본능적인 욕구로서의 수작을 걸어와 순수와 가족의 안온한 가치를 훼손시킨 점에 대한 징벌로 죽음을 당한 것은 그 행위의 설득력이 약할 수밖에 없다. 이 작품에서 엔딩 시퀀스의 반전 역시 그 모티프가 석연치 않고 설득력이 약하다. 차라리 지금까지의 모든 징벌과 살해의 처참한 흔적이 그녀의 상상과 판타지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처리했다면 지금까지의 모든 무리수가 이해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경찰의 수색에 의해 본능적 욕구의 수납공간에서 사체들이 발견되었다는 것은 지금까지의 이 모든 것들이 그녀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근거가 되는 것이다. 그녀의 끔찍한 행위가 설득력을 얻기 위해서는 그 행위에 대한 필연성이 인정되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곧 이 작품의 주제의식과도 맞닿아 있다.

    아버지라는 친화적이고 윤리적인 존재로부터 성폭행을 당해, 가족의 진정한 가치가 훼손되어 그에 대한 징벌로 이러한 비극적인 결과가 도출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은 설득력이 약하다. 본능적 욕구인 괴물(아버지) 그 자체만을 제거했다는 것은 인정될 수도 있겠지만, 이웃집 여자와 택배기사까지 그 희생물로 등장하는 것은 무리수이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그녀의 강한 필연적인 심리적 모티프가 설정되어야 하는데, 이 작품에서는 그러한 강력한 동기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작품의 주제의식이 명확하지 않게 보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희곡에서의 주제의식은 관객에 대한 최소의 배려이다. 공연이 끝나고 관객이 극장 밖으로 나왔을 때, 관객은 다른 것은 몰라도 최소한 연극(희곡)이 주는 그 무엇으로서의 메시지는 인식해야 할 것이다. 그러한 현실인식으로서의 주제를 통해 연극은 관객의 의식을 성숙시키고 나아가서는 그들의 행동까지 변화시켜야 할 것이다. 그것이 곧 연극의 사회적 기능이기도 하다. 연출이 한 작품의 연출에서 끝까지 점검해야 할 것은 주제의식을 명확하게 드러내고 있느냐는 것과, 긴장과 이완의 연결고리로서의 템포와 리듬을 잘 살려내고 있느냐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예작가 김지숙은 날로 진화하고 있다. 그녀와 작업을 지속해 오고 있는 연출자 김동민은 그녀와의 부단한 대화와 토론을 통해, 현실인식으로서의 주제의식을 명확하게 설정해 작품 속에 매설해야 할 책임이 있다. 이런 점만 보완된다면 김지숙은 근래 보기 어려운 지적인 작가의 계보에서 자신만의 독창적 세계를 확보해 나갈 것으로 믿어 의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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