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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김문홍의 연극 이야기>시적 단아함과 여백으로 슬픔을 품다_ 공연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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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적 단아함과 여백으로 슬픔을 품다

    연희단거리패의길 떠나는 가족

     

                                                 

     

    김 문 홍(극작가,연극평론가)

     

     

    절제와 여백의 미학

    길 떠나는 가족(김의경 작, 이윤택 연출, 밀양연극촌 우리동네극장)1991년 현대극장에 의해 서울연극제에서 초연되어 그해 대상을 수상하고, 뉴욕의 라 마마 극장에 초청되어 호평을 받았다. 그러다가 20여 년만인 2014년 명동예술극장에서 이영란의 독창적 오브제로 다시 공연되었다. 이번 밀양연극촌 우리동네극장에서 다시 공연된 이 작품은 콜롬비아 이베로 아메리카노 국제연극제 초청공연을 떠나기에 앞서 국내 관객들에게 미리 선을 보이게 되었다.

    이번 공연의 특징은 절제와 여백에 있다. 우선 무대미술과 장치에서 그것이 도드라진다. 후면 배경막은 이중섭 그림의 궁극적 유토피아가 되었던 아스라한 수평선을 상징하고, 또한 한국의 산하를 나타내는 수묵담채화의 미학을 따르고 있다. 그 앞에 산과 섬을 상징하는 봉우리들이 오롯이 들어앉아 장면전환에 따라 이중섭의 삶의 유전에 따른 배경 공간인 원산, 제주도, 후지산, 부산, 통영이 된다. 무대 우측 끝에서 완만하게 구부러진 길은 현세와 내세, 현실과 환상이 만나는 공간이다. 산중턱에 나 있는 문을 여닫는 것도 산의 은근한 포용과 모성적 이미지를 공감각적으로 상징하고 있다.

    이영란의 사실적 소도구를 대신하는 물체는 이 극의 핵심적 톤이 되는 절제와 여백, 그리고 환상에서 튀지 않게 운용되고 있다. 술 주전자, 사발, 권총, 의자, 리어커, 수레 등은 현실의 진품 대신 피조물로 대체되는데, 어색하거나 튀지 않고 동양적 절제와 여백에 한층 더 잘 어울린다. 이중섭 그림의 소재가 되는 소, , 나무, , 나비, 물고기, 해 등도 은근한 수묵담채화의 은근함과 슬픔이 배어 있다. 만약 실제 현실적 물체를 사용했더라면 쇠붙이의 날카로움과 현실감이 작품의 주조인 절제와 여백을 크게 해쳤을지도 모른다.

    다만 후반부에 이중섭이 캔버스에 그리는 황소 머리의 유화만이 제법 튀는데, 이는 그리움과 자유에 대한 의지, 그리고 심리적 혼란을 상징하는 것일 뿐 이마저도 유순하게 녹아들어 보인다. 이중섭이 황소의 머리를 캔버스에 직접 그려 보이는 연기는 설령 캔버스에 이미 그려진 밑그림을 따른다 할지라도 관객의 탄성을 자아내게 하기에 충분하다. 적십자 병원의 침상에서 이중섭의 발악하는 몸부림에 의해 천정 높이 팽개쳐지는 갓 전등의 움직임과, 그 흔들림에서 파생되는 명암의 이미지가 요동치는 그의 심리적 흔들림을 극적으로 강화시킨다.

     

    한국적 춤사위를 닮은 연기와 움직임

    등장인물들의 연기도 절제와 여백을 따른다. 튀지 않고 장면의 분위기에 스며들 뿐이다. 신체의 움직임도 물 흐르듯 유연하게 부드러운 곡선의 미를 따른다. 방향을 틀어도 각이 져 보이지 않고 한국적 춤사위의 정중동에 가깝다. 움직이되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요란하고 산만하게 보여도 한지에 물이 스며들듯 소리 없이 은근하다. 소리와 움직임을 절제하되 관객의 심상에서는 큰 파장을 일으키게 한다. 장면전환 역시 매듭이 보이지 않은 채 물 흐르듯 부드럽고 빠르다. 섬과 산은 움직이고 있는데 그 앞에서는 다음 장면의 연기가 이미 이루어지고 있다. 한국전쟁의 장면에서도 먼 비행음을 따라 인물들의 고개와 눈이 움직이는 데도 전쟁의 비극적 참상이 이미지로 오롯이 자리 잡는다.

    완만하게 구부러진 길을 통해 등장하고 퇴장하는 아이 인형의 움직임도 큰 울림을 주고 있다. 아이 인형과 조종 배우의 움직임은 혼연일체가 되어 있다. 아이 인형은 이중섭 그림의 주 소재일 뿐만 아니라 그의 영혼의 동심적 순백함, 그리고 가장 동심적인 것만이 아픈 영혼을 보듬고 위로할 수 있으며, 또한 때 묻지 않은 심리적 풍경을 상징하는 다의적인 해석을 요구하기도 한다. 이 연극에서 가장 큰 추동력은 이중섭 그림의 소재들인 오브제들이다. 이들의 움직임은 절제와 여백, 그리고 느림의 미학에 방점을 찍는 극적 효과를 낳고 있다. 게 오브제를 조종하는 이승헌의 마임과 표정 연기는 압권이다. 주위 환경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두려움의 눈빛과 옆걸음을 하는 천연덕스러움은 절로 웃음을 자아내게 할 정도로 안성맞춤이다.

    어머니와 술집 작부, 그리고 피난민을 연기하는 김소희, 동경 유학 시절의 이중섭의 그림 스승을 비롯하여 오브제의 조종을 마다 않는 오동식, 1인 다역의 연기를 특유의 순발력으로 능청맞게 소화하는 이승헌 등, 연희단거리패의 중견 선배 연기자 등인 이들은 무게중심으로 안정감을 주는 한편 극의 다이내믹한 추동력이 되는 모습은 큰 감동이 되기에 충분하다. 이번 공연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이중섭을 연기하는 윤정섭의 열연이다. 그는 그림에 대한 열정, 아내 남덕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 그림 세계를 곡해하는 주위의 시선에 대한 절망, 누추한 현실에 대한 반동으로서의 순결성, 그리고 끊임없는 자유의지 등 장면전환에 따른 복합적인 감정을 역할에 대한 몰입으로 무난하게 승화시키고 있다. 시인 구상을 연기한 이동준과 각설이 패거리에서 이상한 춤과 노래를 불러 보인 두 연기자의 코믹한 순발력도 돋보이고 있다. 다만 이중섭의 아내인 남덕의 역할에 포커스가 부족한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이번 공연에서 가장 두드러진 점은 음악이다. 녹음된 기계음이 아닌 라이브 연주는 극의 분위기에 주효하고 있다. 건반, 기타, 피리, 북 등을 통해 장면전환의 배경음과 노래의 반주, 그리고 구음을 통해 인물의 심리적 상황을 절묘하게 나타내고 있다. 특히 한국적 한과 슬픔을 환유시키는 피리 연주와 구음은 가장 돋보인다. 현장 라이브 연주만이 가질 수 있는 은근한 음색은 절제와 여백을 돋보이게 한다.

     

    연륜의 중후함이 묻어나는 편안한 무대

    문화게릴라인 이윤택은 80년대 후반부터 지금까지 30여 년 동안 한국연극계의 풍운아로 질풍노도의 무대를 그려 왔다. 그는 여느 연출가에게는 없는 특장 하나를 갖추고 있는데 그것은 곧 시적 감수성이다. 어떤 작품이건 간에 그 밑바탕에는 시적 감수성이 매설되어 있다. 그도 이제 60대 중반이다. 연륜의 무게는 속이지 못하는 법이다. 이윤택의 무대미학도 그 세월의 무게를 비껴가지 못 한다. 이전까지의 탁탁 튀는 예리한 현실인식과 저돌적인 밀어붙이기 대신 요즈음은 은근함과 느림의 미학에서 풍기는 여유가 있어 보인다. 요즈음 그가 아동극과 가족극에 집착하는 연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번의 무대 역시 그런 세월의 힘이 느껴진다. 도시의 한복판을 맹렬하게 내닫는 에너지보다는 수묵담채화의 산수를 배경으로 시골길을 느릿느릿 걷는 여유와 여백이 있어 보인다. 절제와 여백이 바로 그것이다. 무대를 꽉 채우기보다는 하나씩 비워내고 있다. 채움에서는 상상력의 여지가 없다. 비우면 그 자리에 상상력이 오롯이 자리 잡게 되어 있다. 이번 공연에서도 장면 전환의 순발력으로 여백이 줄어드는 것처럼 보이는데, 음악과 구음 등을 좀 더 보강하여 그 틈을 메워 주었으면 한다. 강하면 부러진다. 부드러워야 오히려 더 강해진다. 이베로 아메리카노 국제연극제에서는 보다 더 한국적인 것이 세계인을 감명시킬 것은 분명하다. 극장을 가득 메운 관객들이 기립박수를 치며 환호하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은 결코 평자만의 개인적 바람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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